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복음주의 신앙』(The Evangelical Faith)에서 실행의 신학(a theology of actualization)과 순응의 신학(a theology of accommodation)을 서로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다룬다. 실행의 신학은 “항상 진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뤄졌으며…그 진리는 항상 온전한 원래의 상태로 남아 있다.” 말하자면 실행의 신학에서 청중은 자기만의 독특하고도 고유한 상황 속에서 진리 아래로 나오도록 소환을 받는다. 반면에 순응의 신학은 이와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이 신학은 반대로 진리를 내 아래로 끌어내리고 내가 그 진리의 주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순응의 신학은 “내가 인생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게” 할 정도로 다분히 실용주의적인 신학이다.
틸리케는 순응의 신학을 가리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 속에서 절대진리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개인 자아를 내세웠던 17세기의 철학자인 데카르트의 입장을 따라서 데카르트의 방법이라고 부른다. 틸리케에 의하면, 데카르트 신학의 표현 방법은 광의적인 의미로 볼 때 합리주의(rationalism)와 경험주의(experientialism)의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 철학적인 전제에서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달리 설명해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삶에 관한 매우 합리적인 사고 체계이다. 당신이 이를 받아들이고 그 체계대로 살아갈 때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당신은 삶을 아주 당차게 꾸려갈 수 있으며 아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거나, 또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다. 그분이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인생을 주장하시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더 나은 인생을 경험할 것이다. 원하는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허락될 것이고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신앙을 받아들인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실행하는 것에 달렸으며, 그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더 좋아질 것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자기 인생을 통제할 수 있을까에 달렸다.
하지만 실행의 신학은 순응의 신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상실한 상황에 집중한다. 이 신학에서 인간은 “진리 아래” 위치하기 때문에, 신학의 강조점이 “당신에게 좋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 대신 이 신학에서 강조되는 진리는 인간이 하나님 아래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행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대담한 선언을 통해서 사람을 진리 앞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에 관한 진리 앞으로, 그리고 그러한 상황과의 연루와 관여에 관한 진리 앞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비참한 상황 속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이를 정복하셨다는 진리 앞으로 이끌어 들인다. 그러한 접근 방식이야말로 사도들이 전했던 케리그마 설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실행의 신학은 복음의 소통에 관한 역사적인 접근 방식에 해당된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피조물의 한계에 굴복하거나 현대의 철학적인 사고 체계에 의존하는 일종의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절대 진리인 성경 메시지를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실행의 신학은 절대 진리는 항상 인간의 설명이나 이해의 수준보다 더 심오하고 더 복잡하며 더 신비롭다고 말한다.
로버트 E. 웨버, 복음주의 회복: 내일을 위한 어제의 신앙, 로버트 E. 웨버, 초판, vol 7,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358–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