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기독교 전통은 니케아 신조 안에 진술된 교회의 참된 표지들을 인정하지만,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시도한다. 그들은 “교회의 통일성,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의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듣는 것이며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루터에 따르면 “만약 교회에 말씀이 없다면, 교회는 교회 되기를 중단하는 것이다.”40) 칼뱅 역시 이 점에 동의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들려지며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서 성례가 집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41) 이런 종교개혁의 견해는 기성 교회의 비판, 즉 종교개혁 운동은 니케아 신조의 교회론을 거부했다는 비판에 대응하기에 적합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 자체 내의 분열적 경향에 맞서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사실 교회의 표지를 다루는 이 두 개의 목록은 상호 보완적이다. 종교개혁의 목록이 없다면 니케아 신조의 교회 묘사는 승리주의적이거나 도덕주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니케아 신조의 표현이 없다면 종교개혁의 목록은 분열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의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에 서 있는 우리는, 교회를 설명하는 목록이 전통적인 해석을 따른 앞의 두 가지만으로 충분한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신약 시대 이후로,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곳에는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교회론의 원리가 되어왔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교리적인 대답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리스도는 주교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스도는 성만찬이 집행되는 곳에 있다. 그리스도는 복음이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에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은사가 드러나는 곳에 있다. 이런 대답들도 각각 일리는 있지만, 그중 어느 것도 마태복음 25:31과 그 이하 구절에서 제시된 대답을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 텍스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과 배고픈 자들, 병들고 갇힌 자들 가운데 계신다. 따라서 지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자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귀의 교회(이곳에서는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들려진다)나 눈의 교회(이곳에서는 신실한 자들이 보고 경험하기 위해 성례가 집행된다)일 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교회이기도 하다
다니엘 L. 밀리오리 and 새물결플러스,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trans. 신옥수 and 백충현, 개정3판 ed.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471–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