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1-04 07:24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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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서은성
조회 :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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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늘 제도권과 변방의 대결을 되풀이하였다. 제도권은 보수적이고 현상유지적이다. 변방의 기세를 짓눌러 버림으로 제도를 유지하려하나 쉽지 않은 일이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다(행4:5,6).
체포한 자들을 심문하기 위해서이다. 체포된 자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행4:2)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수 많은 증인들, 목격자들이 엄연히 생존해 있는 시점이다. 부활의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리려는 것이다. 자신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전하지 못하도록 자기 코드에 맞는 인사들만 언론매체에 배치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남자의 수만 약 오천이라고 하였다(행4:4).
제도권이 나서서 사도들을 불러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제도를 장악한 자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권세자인데 자신들 허락없이 왜 제도를 흔드는 일을 하느냐 심문한 것이다. 제도를 장악한 자들이 엄하게 나서면 그 위세 앞에 주눅들기 마련이고 겁을 먹기 마련이다. 그렇게 제도권은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권위의 출처를 밝힌다.
제도권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겁먹지 않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말한다.
종종 이단들도 자신을 제도권으로부터 박해받는 변방의 세력이라고 동일시하면서, 제도권은 붕괴되지만 자신들은 일어설 것이라 큰 소리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진리없는 껍데기나 허상의 현상 말고!
오늘 우리 시대에 제도권은 무엇이고, 변방의 능력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변방의 자리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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