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함께 가는 자들이 제자들이고, 이 길이 제자도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대가를 치르는 길이다. 예수님은 그 길이 어떤가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첫 번째 사람이 나서서 먼저 말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9:57)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함께 가겠다고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마음이 흡족하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이 과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자기가 장담한 말을 행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름으로 이 세상에서 얻게 될 반대급부를 계산한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말씀하신다. 여우나 새도 집이 있지만 제자는 이 세상에서 안전과 거처를 보장받고 나서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거의 안전을 가장 우선의 것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집을 마련하고 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는 듯 보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둥지를 틀고 안전을 확보하려는 태도까지 내려놓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또 다른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9:59)한다.
만일 부친이 죽었다면 이미 장례식장에 가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핑계일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따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의외로 이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님을 핑계로 삼아 제자의 삶을 유보한다.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도도 한 적이 없이 그렇게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가족과 작별하는 것이 단순한 인사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 다 살 수 있는 기반과 터전을 잡아준 다음에, 가족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 한 다음에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족은 주님이 세우신 제도이다. 가정을 해체하신적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겠다는 제자의 삶에 대한 회피의 의도로 사용한 핑계의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너무 많아, 쟁기를 잡으면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쟁기사용법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는가? 제자의 길은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 그대로 가는 것이다. 오늘 맥체인 성경읽기 병행본문인 욥기 23장에서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욥은 고백한다. 주님이 가신 길, 믿음의 선배들이 행했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기를 소망하며!